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북한이 경제실리외교를 추진했던 1970년대 이래로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는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무역적자, 외채상환 불이행과 밀수사건 등으로 국제적 신용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 서유럽 국가들과의 관계에 기대했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90년대 말 냉전 종식과 공산권 붕괴로 북한은 국제적 고립탈피를 통한 체제유지와 경제발전을 위해서 전방위 외교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과거기록이 대서방외교 확대에 제약요인이 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유럽연합이 북한에게 요구한 인권문제 개선과 관련한 정치대화를 북한이 수용한 것은 대미 견제장치로서 뿐만 아니라 북한의 고립탈피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기에 북한의 식량난은 유럽연합과의 관계회복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유럽연합은 북한과의 인권대화를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로 편입시키는 데 기여하고 한국 정부의 화해협력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북한의 입장에서는 유럽연합에 의한 인권문제 개선 강경 요구로 대유럽연합에 대한 시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유럽연합의 대북정책은 미국의 대북한 강성권력 확산정책과는 달리 연성권력 확산의지를 갖고, 동시에 한국의 포용정책과 달리 보편적 원칙을 준수하면서 북한 사회의 개선을 요구하는 선택적 포용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환경에 따른 미국의 적극적인 국제질서 재편전략과 생존을 추구하는 북한의 대외전략이 상호작용하면서 유럽연합과의 협력과 대결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유럽연합은 북한과 1998년 정치대화를 시작한 이후, 2000년 11월 ‘대북한 행동지침’을 채택하여 북한의 고립보다는 대북지원을 통해 체제개방을 유도하여 북한을 국제사회로 편입시키겠다는 입장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 지침을 통해서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북한과의 관계발전에 보다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포용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이는 부시 행정부의 정책과 명확히 대별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2001년 초 북미대화가 단절되고 미국이 대북 강경발언들을 쏟아내는 상황에서 유럽연합과 회원국들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한 것은, 부시정부의 대북정책이 확정되기 이전에 일정한 경로를 형성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유럽연합의 포용정책과 한국 정부가 추구했던 포용정책은 일정한 차이가 있다. 유럽연합과 한국의 대북한 접근방식의 차이점은 유럽연합의 경우 포용정책에 분명한 ‘조건’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예로 북핵문제가 불거진 다음에 개최된 2003년 일반이사회에서는 북한과 국제사회와의 향후 관계는 북한측이 얼마나 신속하고 검증가능하게 북핵 문제를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북한에 대한 조건 부여는 반드시 핵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권개선, 핵비확산, 외부지원에 대한 주민들의 접근성 개선, NGO 활동여건 개선, 북한 경제의 개방과 구조적 개혁 등 북한 내부의 개선 정도에 상응하여 북한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을 늘리겠다는 것이 유럽연합의 기본방침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부여는 외형적으로 나타난 조건에 불과하다.
유럽연합은 2001년 5월 북한과의 공식적 외교관계 수립 이후 대북정책의 주요 전개 방향을 대북전략보고서를 통해 분명히 제시하고 유럽연합과 회원국들의 대북정책 추진시 참고하도록 하였다. 유럽연합은 인권존중, 민주주의, 법의 지배촉구라는 일반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 북한에 대한 지속적인 경제적․사회적 발전, 세계경제 편입, 빈곤퇴치를 협력 목표로 설정하였다. 특히 인권,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남북한 화해, 북한경제구조개혁 등과 관련한 북한당국의 협조 여부에 따라 유럽연합의 지원 여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즉 공식적으로는 북한당국이 인권문제 이외에 핵문제, 경제정책 등에서 주변국들과 국제사회에 가시적인 성과를 제공하지 못할 경우에 유럽연합을 비롯한 유엔 등 국제사회의 대북 인권압박은 강화 될 것이다. 한편, 이와 비례해서 비공식적 행위자인 초국적 기업들과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은 한층 증대될 것이다.
요컨대 인권문제는 유럽연합에게는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의 문제이다. 민주주의의 확산, 선정, 법치, 핵비확산 등도 유럽연합이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에 속한다. 따라서 유럽연합에게 있어서 이러한 중요한 가치와 북한의 개선을 도모하는 정치적 대화와 경제적 지원의 연계는 당연한 것이다. 유럽연합이 2002년 북핵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대북한 기술지원, 즉 개발원조 제공 계획을 정지시킨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유럽통합의 심화는 유럽연합과 북한간의 관계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아래 〈그림 1〉과 같다.
〈그림 1〉유럽연합과 북한간의 관계악화 원인 및 특징
한편, 유럽연합은 2008년 9월부터 총 8백만 유로를 지원해 북한의 농업 생산량 증대를 돕기 위한 식량안보사업(Food Security Program)을 시작했다. 본 사업에 참가한 단체들은 독일의 ‘저먼 애그로 액션(German Agro Action)’, 영국의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 아일랜드의 ‘컨선 윌드 와이드(Concern Worldwide)’, 프랑스의 ‘트라이앵글(Triangle)’과 ‘프리미어 어전스(Premiere Urgence)’ 등 북한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활동 중인 유럽의 5개 NGO와 벨기에의 본부를 둔 국제 NGO, ‘핸디켑 인터내셔널(Handicapped International)’ 등 총 6 곳이다.
유럽연합은 공식적 지원규모는 줄이는 반면, 인도적 지원사업과 초국적 기업을 통한 대북투자는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이는 첫째, 북한의 광물 및 지하자원에 대한 선점, 둘째, 기간산업 선점, 셋째, 시장 화개 대비 포석의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다. 북한과 유럽연합의 경제협력 현황을 살펴보면 유럽연합은 북한의 교역량 3위의 파트너로 북한의 전체 무역에서 약 10% 정도를 차지한다. 2006년 기준 유럽연합 회원국 중 북한의 최대 교역 파트너는 독일이며,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 스페인이 그 뒤를 잇고 있다. 2004년 유럽연합은 5차 확대로 10개국이 신규 가입했으므로 그전의 교역액과는 비교가 불가능 하나 아래 〈표 4〉에 나타나듯이 북한은 유럽연합과의 교역에서 천만 달러 정도의 적자를 지속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표 4〉북한과 유럽연합 간 교역 현황
(단위: 백만 달러, %)
|
북한의 수출 |
북한의 수입 |
합 계 |
|||
|
금액 |
증감률 |
금액 |
증감률 |
금액 |
증감률 |
2001 |
81 |
-10.4 |
232 |
40.3 |
314 |
22.5 |
2002 |
65 |
-24.6 |
283 |
16.6 |
348 |
9.8 |
2003 |
61 |
-6.6 |
257 |
-10.1 |
318 |
-9.4 |
2004 |
87 |
|
174 |
|
261 |
|
2005 |
91 |
4.9 |
201 |
15.3 |
292 |
11.8 |
2006 |
70 |
-23.3 |
165 |
-18.5 |
234 |
-19.9 |
*자료: KOTRA, 북한의 대외무역동향
〈표 5〉유럽연합 주요 기업이 대북투자 사례
국가 |
분야 |
시기 |
내용 |
독일 |
인터넷 서비스 |
2004. 2 |
KCC Europe 북한 온라인 시장 선점을 위한 투자, ‘내나라’라는 포털 사이트 개설 |
여행상품 |
2004. 10 |
베를린 여행사는 북한 철도 여행상품 판매 |
|
투자정보 수집 |
2002.9 |
독일 17개 기업 및 금융기관으로 구성된 ‘동아시아협회(OVA)’ 평양사무소를 통해 양국 기업 간 개별 상담 진행 |
|
스웨덴 |
발전 송신 |
2000.11 |
스웨덴․스위스 합작 기업인 ABB는 북한 내 배전망 현대화에 관한 ‘전기기계설비 생산과 전력망 현대화 협조 합의서’체결 |
무선통신 |
2002 |
스웨덴의 ‘에릭손’ 북한 내 무선통신장비 설치 사업 참여 모색 중 |
|
소비재 구매 |
2001 |
유통업에 ‘미그로스’ 북한산 가방류, 가전용품 등 구매 |
|
의약품 |
2001 |
‘인터퍼시픽 홀딩스’ 200만 유로투자 의약품 생산기지 확보, 북한 평양제약사와 평스 제약협력 합영회사 설립 |
|
영국 |
담배제조 |
2001 |
‘브리티쉬 아메리칸 타바코’는 북한 석용무역과 합작 710만 달러 투자하여 담배제조공장 운영 |
유전개발 |
2004 |
‘아미넥스’ 정유회사 북한 유전개발과 관련 20년간 시추권 계약체결(채굴가능 원유매장량 40억-50억 배럴) |
|
금융 |
2005 2008.1 |
‘앵글로 지노 케피탈’은 북한 자원개발사업 투자를 위해 5천만 달러 규모의 조선개발투자펀드 조성 계획 발표 ‘파비엔 픽테트 앤 파트너스’는 북한 합작회사들에 대한 투자 목적의 펀드 조성 중 |
|
컨설팅 |
2006 |
‘코리아 비즈니스 컨설팅’ 평양에 지사 설립 |
|
이탈리아 |
컨설팅 |
2005.6 |
‘브리델리 컨설팅’ 평양에 투자관련 법률 사무소 개설 |
자동차 |
1999 |
FIAT사는 평화자동차와 합작으로 ‘휘파람’, ‘뻐꾸기’ 등을 현지에서 조립하는 녹다운 방식으로 생산 중 |
|
프랑스 |
통신 |
2002 |
‘알카텔’ 북한의 통신 분야 보수, 교체작업 |
컨설팅 |
2002 |
‘리브라 카운셀’ 북한내 컨설팅 사무소 설립 |
|
애니메이션 |
1985 |
프랑스 애니메이션 제작업체는 북한의 SEK Studio와 애니메이션 제작 계약을 체결 임가공 형식으로 수출 |
|
여행상품 |
2006.4 |
‘CGTT’여행사 평양, 남포, 개성 방문의 8일 코스 상품 판매 |
|
오스트리아 |
인력 송출사업 |
2003 |
‘크리스티안 레륵흐바우머 수출 컨설팅’ 북한 인력의 사우디, 카타르 및 제 3세계 국가 진출 주선 |
피아노 제작 |
2002 |
‘제이 내멧쉬커’ 평양피아노사와 합작계약 체결, 2003년부터 피아노 생산 |
|
|
2005 |
‘F.J Elsener Trading’ 북한 철도청과 철도 레일 납품 계약 체결 |
*자료: EU 신아시아 전략의 분석과 시사점, 『한국경제주평』현대경제연구원, 2008, pp. 12-16에서 재구성.
회원국 기업들의 투자 동기별 사업 유형을 분석해보면 첫 번째는 자원 확보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자원․에너지 확보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미지의 개척지대로 광물자원의 보고로 평가 받고 있어, 북한의 광물 및 지하자원에 대한 유럽연합의 투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두 번째는 기간산업 선점 목적으로 북한의 국제사회로의 편입이 진행될수록 기간산업에 대한 막대한 자금의 투자가 예상되어 선점 효과가 매우 크기 때문에 회원국 기업의 이에 대한 투자가 가장 활발하다. 세 번째는 북핵문제 해결 및 테러 지정국 해제 등으로 각종 제제가 해소되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투자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아 신흥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으로서 잠재 성장성에 대한 기대 차원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유럽연합은 정치적 사안인 인권문제를 거론함과 동시에 설명한 바와 같이 경제적 영향력 확대를 위해 민간 기업인을 활용하고 있다. 북한 시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국 진출 유럽 기업들은 북한의 사정을 잘 모르는 유럽연합의 정책결정 실무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한 통상정책 의사결정구조의 복잡성은 초국적기업으로 하여금 그들의 정보력과 자원을 동원시키기에 상당히 용이한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EUCCK: European Union Chamber of Commerce in Korea)는 1996년 북한위원회(North Korea Committee)를 발족시켰다. 2001년 5월에는 유럽-코리아 재단을 설립하여 유럽연합 기업들의 북한 진출을 위해 구체적인 투자정보를 집행위원회에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일부 유럽 기업인들이 주한유럽연합상공회의소 대표단 명목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북측 상공인 및 경제 관료들과 접촉을 하는데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유럽연합내 대북진출기업 또는 예정기업들의 정기적 모임은 집행위원회 실무담당자들이 대북정책을 입안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출처: Denuclearizing North Korea: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after Hanoi (isdp.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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